ERP에게 보내는 편지 — 18년간 당신의 통역사였던 사람이
생산계획 담당자가 18년 동안 모시던 ERP 시스템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 AI Agent가 현장과 시스템 사이의 통역을 대신하기 시작한 날의 기록.

친애하는 ERP에게
당신과 처음 만난 건 2008년이었습니다. 회사가 당신을 도입하던 날, 전 사원이 교육장에 앉아 매뉴얼을 받았습니다. 200쪽짜리. 저는 그걸 다 읽었습니다.
그때부터 제 직함은 생산계획 담당이었지만, 실제 업무는 통역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당신이 알아듣는 언어로 바꿔 넣는 것. 설비가 멈추면 저는 현장에 뛰어가고, 돌아와서 당신 화면에 코드를 입력했습니다. 비가동 사유 M07. 금형 파손.
당신은 한 번도 현장에 온 적이 없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생산 실적을 수기로 옮겼습니다. 오후엔 자재 입출고를 대조했습니다. 월말이면 재공 재고를 세고 당신에게 보고했습니다. 당신이 뱉어낸 MRP 결과가 현실과 맞지 않으면, 제가 엑셀로 다시 고쳤습니다. 늘 그랬습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당신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넣어준 숫자가 맞으면 당신의 계산도 맞았습니다. 문제는 제가 넣어주는 숫자가 항상 늦었다는 겁니다. 설비가 30분 전에 멈췄는데, 제가 입력하는 건 점심 이후였으니까.
통역사가 필요 없는 날이 왔습니다
지난달, 우리 공장에 AI Agent라는 게 들어왔습니다. 처음엔 또 시스템 하나 느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놈은 좀 달랐습니다.
설비 센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읽습니다. 비가동이 발생하면 스스로 사유를 분류합니다. 자재 입고가 되면 재고를 즉시 갱신합니다. 제가 18년 동안 하던 통역을, 이 Agent가 쉬지 않고 해냅니다.
제가 충격받은 건 속도가 아닙니다.
이 Agent는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가끔 했습니다. 비가동 시간이 너무 길면 좀 줄여서 넣었습니다. 불량률이 튀면 원인을 찾기 전에 일단 숫자를 맞췄습니다. 월말 보고서 마감이 내일인데 재고가 안 맞으면, 제가 조정했습니다.
그게 나쁜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냥 현실과 시스템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면 그래야 했습니다. 그 간극이 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저는 지금 뭘 하느냐면
통역을 그만두니, 이상한 시간이 생겼습니다. 하루에 두세 시간. 처음엔 어색했습니다.
그 시간에 저는 지금, 왜 3번 프레스 라인의 불량률이 수요일마다 올라가는지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AI Agent가 정리해준 3개월 치 데이터를 보면서. 18년 동안 한 번도 못 했던 일입니다. 숫자를 옮기느라.
당신에게 보내는 이 편지가 작별 인사는 아닙니다. 당신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고, 아마 한동안은 계속 돌아갈 겁니다. 다만 이제 당신과 현장 사이에 저 대신 지치지 않는 통역사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처음으로, 생산계획 담당자로서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박정수 드림
박정수는 경기도 소재 자동차 부품 2차 협력사에서 18년째 생산관리 업무를 맡고 있다. 회사명은 본인 요청으로 비공개.
MOAI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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