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2026.04.16

ERP에게 보내는 편지 — 당신 옆에 AI Agent가 앉았습니다

15년을 함께한 ERP 시스템에게, 자재팀장이 보내는 솔직한 고백. AI Agent가 발주서를 대신 쓰기 시작한 날부터 달라진 것들.

ERP에게 보내는 편지 — 당신 옆에 AI Agent가 앉았습니다

친애하는 ERP에게

당신과 15년을 함께했습니다.

2011년 도입 첫 날, 나는 두꺼운 매뉴얼을 펴놓고 발주 화면 하나 여는 데 40분이 걸렸습니다. 지금은 눈 감고도 칩니다. 트랜잭션 코드 외우는 게 자랑이던 시절이 있었어요. 후배들한테 "ME21N은 손이 기억해야 한다"고 훈수도 뒀습니다.

그런데 지난달, 당신 옆자리에 누가 앉았습니다.

AI Agent입니다.

처음엔 불쾌했습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내가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해서 하던 일 — 전일 재고 확인하고, 안전재고 밑으로 떨어진 품목 추려내고, 리드타임 역산해서 발주 수량 잡고, 단가 비교하고, 품의서 올리는 일. 그 루틴을 Agent가 새벽 4시에 끝내놓더군요.

발주 추천 리스트가 내 화면에 떠 있었습니다. 품목별 추천 수량, 근거가 된 소모 추세, 대안 공급처까지.

틀린 게 없었습니다.

아니, 하나 있었습니다. A소재 발주량이 내 기준보다 12% 적었습니다. Agent는 최근 3개월 실소모 데이터와 다음 주 생산계획 확정분을 교차해서 산출했고, 나는 "작년 이맘때 긴급 발주 났으니까 여유분 깔자"는 경험치를 얹고 있었습니다.

누가 맞았을까요.

4주가 지나고 안 것

Agent가 맞았습니다. 3번 중 3번.

내 여유분은 창고 한 켠에 쌓여 있었습니다. 수천만 원어치. 작년과 올해는 달랐습니다. 제품 믹스가 바뀌었고, 거래선 하나가 리드타임을 2주에서 8일로 줄였습니다. 나는 그 변화를 머리로는 알았지만, 손은 작년 패턴을 치고 있었습니다.

ERP, 당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신은 내가 입력한 대로만 움직였으니까요. 안전재고 기준값을 내가 바꾸지 않으면, 당신은 영원히 작년을 삽니다.

당신을 버리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Agent는 당신을 대체하지 않았습니다. 당신 위에서 일합니다. 당신의 데이터를 읽고, 당신의 화면에 입력합니다. 달라진 건 중간에 있던 내 역할입니다.

나는 이제 발주서를 "작성"하지 않습니다.

발주서를 "판단"합니다.

Agent가 올린 추천을 보고, 승인하거나 수정합니다. 수정할 때는 근거를 남깁니다. 그 근거가 다시 Agent의 학습 데이터가 됩니다. 내 경험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시스템에 녹아드는 겁니다.

후배들에게 미안한 것 하나

"트랜잭션 코드를 외워라"고 했던 그 훈수. 취소합니다.

외울 게 아니라 질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발주량의 근거가 뭐야?" "대안 공급처는 왜 B사가 아니라 C사야?" Agent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사람이, 코드를 빨리 치는 사람보다 낫습니다.

짧게 말하면 이겁니다.

ERP, 당신은 내 손의 연장이었습니다. Agent는 내 판단의 거울입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다만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달라졌을 뿐.

15년치 감사를 담아,

박경수 드림

M

MOAI 팀

제조 AI의 미래를 만들어 갑니다

MOAI와 함께하고 싶으신가요?

고객으로, 또는 팀원으로 함께하세요.